고속철도와 `폭탄돌리기'
[EBN 2006-02-18 09:34] ---매일경제TV----
무모한 건설과 과다차입으로 인한 `부채폭탄' 더 미룰 수 없다
[EBN산업정보 차기태 기자] 고속철도가 싣고 온 ·부채폭탄‘이 폭발 위기로 치닫고 있다.
고속철도로 인한 부채급증에 시달리던 한국철도공사가 정부에 4조5천억원의 부채인수를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철도공사는 올해 수입은 약 4조3천여억원으로 전망된다. 이 가운데 자체매출은 3조3천억원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채는 이미 5조8천억원에 이른다고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은 16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밝혔다.
민간기업으로 말하자면 매출보다 부채가 훨씬 큰 전형적인 부실기업인 셈이다. 이철 사장은 철도공사의 과다한 부채는 고속철도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92년 고속철도 공사가 시작될 때 정부는 총사업비로 모두 5조8천억원선이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2003년 완공때까지 실제 투입된 것은 18조4천억원에 이른다. 정부 예상의 3배 이상 들어간 것이다.
고속철도의 지난해 수송수입은 5천억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거액을 조달하기 위해 당시 고속철도건설공단은 채권발행 등을 통해 외부자금을 동원했다. 그래서 약 10조원의 차입금이 발생했고, 이 가운데 5조8천억원이 철도청의 철도공사 전환과 함께 인계됐다.
결국 현재의 철도공사 부채는 고속철도 건설을 위해 끌어들인 ·차입건설‘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고속철도 건설은 초기부터 무리한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런 비판에 귀막고 사업을 강행했고, 마침내 거대한 ·빚동산‘을 쌓아올린 셈이다.
철도공사가 지게 된 빚동산은 무게는 공사가 홀로 떠맡기에는 너무 크다. 지구를 어깨로 짊어지고 있는 아틀라스의 처지와 비슷하다.
아틀라스가 짊어지고 있는 지구의 무게는 더 늘어나지 않지만, 철도공사의 빚더미는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워질 전망이다. 해마다 발생하는 운영수지 적자에다 막대한 부채에 따른 이자부담까지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2015년에는 부채규모가 22조원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철도공사는 주장했다.
그러나 아틀라스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조직은 철도공사가 아니다. 정부여야 한다. 누가 뭐래도 고속철도는 정부에 의해 계획됐고, 그 계획에 의해 건설됐기 때문이다. 대형 국책사업 가운데서도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고속철도가 국책사업인데도 정부는 재정자금을 투입하는데는 지극히 인색했다. 건설자금의 65%를 차입으로 메운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금조달 방식은 한보 기아 한라 진로 대우 현대 등 과거의 부실재벌들과 너무나 닮았다. 이들 재벌은 모두 차입에 의존하는 위험한 경영을 거듭한 끝에 결국 스스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까지 함께 도산의 위험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민간기업의 투자를 위한 자금이 모두 자기자금일 필요는 없듯이, 고속철도 건설자금도 모두 정부재정으로 메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차입이나 채권발행을 통해 외부자금을 끌어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쳐서는 안되는 일이다. 적절한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고속철도 건설에는 소요자금의 3분의2가량을 차입으로 동원했다. 민간기업이라면 이미 부도처리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제가 아무 걱정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제 와서 정부가 철도공사 부채를 인수할 경우 그 부담이 국민의 세금으로 돌아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 철도나 도로 항만 등의 사회간접자본 건설사업은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정부의 기본적인 책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무는 정부 재정 즉 국민세금에 의해 수행된다.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이 책무를 방기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정부가 부채인수를 기피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해마다 늘어나는 고속철도 운영적자에다 차입금 이자부담까지 눈덩이처럼 불어나 부채규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정부재정에 큰 부담이 됨은 물론 국가신인도에도 악영향을 줄 것임이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이철 철도공사 사장은 수익증대와 부채축소를 위해 강력한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당연한 일이다.
고통분담을 위한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할 뿐더러 공무원체질, 공사체질의 혁신을 위해서도 구조조정을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국민세금으로 부채를 해결하려 하는데 구조조정은 필수조건(sine qua non)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구조조정도 지금처럼 부채규모가 과다한 상황에서는 ·언발에 오줌눟기‘가 되기 쉽다.
더욱이 구조조정이란 미명 아래 무리하게 인력감축의 칼을 휘두를 경우 초래될 부작용도 우려된다. 이를테면 인건비 절감에 급급한 나머지 철도정비요원이나 승무원도 충분히 확보하지 않은 채 수익력 제고에만 열을 올리다 보면 승객에 대한 서비스가 부실해진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대형사고를 야기할 가능성이다. 이미 적어도 철도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돼 있으므로, 안전운행과 관련된 부문에는 필요인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 승무원과 정비요원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안정된 생활수준이 보장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될지 알 수 없다.
민영화 필요성도 일부에서 거론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이를테면 정부가 철도공사의 일부 또는 전부를 민간에게 매각한다고 할 때 현재 상태에서 그 어느 투자자가 인수하려고 할까? 부채는 과다하고 운영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인수하겠다고 나서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이나 다름 없다. 나선다고 해도 우선 부채축소를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굳이 민영화하려고 한다면 우선 대폭적인 부채축소가 선행돼야 한다. 가장 간명한 부채축소 방법은 바로 정부가 인수하는 것이다. 기아나 한보 제일은행 대우 등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을 정리할 때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과 같은 원리다.
민간 부실기업 정리하는 과정에서도 공적자금이 투입됐는데, 하물며 국민의 경제생활과 직결돼 있는 철도공사의 부채축소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부채 축소가 마무리된 다음에야 민영화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민영화는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철도공사의 과다한 부채는 지난날 대한민국의 ·과욕‘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재정형편이 허락하지도 않는데 무조건 강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소득이 넉넉하지도 않은 사람이 1억원짜리 승용차를 사서 굴리다가 빚더미에 올라앉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누군들 1억원짜리 승용차나 10억원짜리 집을 갖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욕심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형편 때문이다. 형편이 안되면 가격이 다소 싼 제품을 사거나 기존에 사용하던 것을 개선해서 쓰기도 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소비자들은 모두 이렇게 한다.
그러나 유독 대한민국 정부만은 지금까지 이런 상식을 지키지 않았다. 철저하게 무시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해동안 겨우 5천억원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10여년동안 18조원이나 쏟아붓다니! 참으로 동화 같은 셈법이 아닐까 한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기회도 여러번 있었다. 노태우 정부때 시작된 고속철도 건설사업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지만, 정부는 언제나 모른 체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감사원까지 재검토를 요구했지만 메아리 없는 목소리로 끝났다. 역대 정권이 폭탄돌리기‘를 해온 셈이다.
역대 정권이 미뤄온 그 ·폭탄‘의 뇌관을 이제는 신속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이제 그 책임을 노무현 정부가 떠맡은 셈이다.
노무현 정부가 이번에는 잘 해결해 낼 수가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다음 정권으로 또다시 폭탄을 넘겨버릴까?/차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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