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영자가 너무 바빠서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연주회에 갈 수 없었다. 대신 ‘경영 합리화 전문가’에게 표를 주었다. 다음날 연주회가 어땠는지 물었다. ‘메모’는 다음과 같다.
1. 오보에 연주자들은 한참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 또한 오보에는 연주에서도 크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오보에 연주 부분을 아예 없애는 것도 바람직함.
2. 12명의 바이올린 연주자는 동일한 악보를 같이 연주하고 있음. 이는 불필요하게 인원만 늘여 놓은 것으로 과감히 축소 조정할 필요가 있음. 굳이 커다란 음량을 보장해야 한다면 ‘음향 증폭기’를 사용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임.
3. 오케스트라는 16분 음표의 ‘반음’을 연주하는데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음. 세련미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으로 보이므로 모든 음표를 인접한 16분 온음표와 통합시켜 연주할 것을 권장함. 그렇게 하면 ‘뛰어난 연주자’ 대신 웬만큼 연주하는 사람도 악단에 고용이 가능하며 비용 역시 매우 절감되는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4.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이미 연주한 것을 호른 연주자가 반복해서 연주하고 있음. 호른 연주의 반복되는 후렴 경과구를 삭제한다면 호른 연주자를 줄이는 한편, 연주 시간을 2시간에서 20분 정도로 대폭 축소할 수 있을 것임. 공연 횟수의 증가와 더불어 관객의 수적 증가를 기대해 볼 수 있음.
5. 만약 ‘슈베르트’씨가 제가 앞서 지적한 사항을 고려했다면 교향곡을 완성할 수 있었으리라는 판단임.』
전제(前提)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이 교향곡 감상문을 읽으면 우리는 대번에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경우처럼 전도된 논리 구조를 가지고 삶을 재단하는 경우가 참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그런 논리에 수긍하고 압도 되어 가는 현실을 자각할 때면 일순 망연자실하기도 합니다.
‘미친 논리’를 대표적으로 꼽아본다면 이런 것일 테지요. ‘효율성’과 ‘경제성’을 내세우며 우리들 삶을 재단하는 논리, 어릴 적 불과 18세까지의 주입식 교육 경쟁력을 가지고 40년이나 50년 이상이나 살아가야 할 아이들의 미래를 재단하는 논리, 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논리, 수만 년 이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을 당대에 소비할 생각만 하는 환경개발 논리 등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생명은 귀하다고 하며 이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의 과정을 살아가는 어떠한 삶이든 존귀함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현실에서는 그러하질 못합니다. 우리들 머릿속에 싹을 틔운 ‘경쟁력’과 ‘효율성’ 때문에 수십 년에 걸친 산아 제한으로 자식이라곤 하나 둘 밖에 없는 이 조그만 나라에서조차 밥 벌어먹기에 ‘불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이러한 논리가 가득 차면 세상은 생명 위에 경제가 있고, 삶의 존엄 위에 구조조정이 버티고 있는 ‘야차 같은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고 각박하며 위험하고 불안해 진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적이고 불필요한 사람이 많아진 탓이 아닐까요?
장자(莊子)가 혜자(惠子)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답니다. “자네 말은 쓸데없는 말이 많네” 그러자 장자가 점잖게 말합니다. “저 넓은 들판을 건너려는 자네가 걷는 데는 두 발만 디디는 땅만 있으면 되네. 허나 그렇다고 저 꽃과 나무와 풀이 있는 들판이 사라져 버리고 두 발만 디디는 땅만 있다면 자넨 오도 가도 못할 것이네. 내 말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네.”
세상 누구의 삶을 군더더기라 하겠습니까. 일생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그리고 쫓겨 가야 하는, 그들 삶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는 이랜드 노동자들과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KTX승무원 동지들 등 모든 노동자들은 만고(萬古)에 비추어 옳고도 옳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