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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마을사람들은 마을회의를 열어 마을 어귀에다 가로등을 다는 문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가구당 분담하여 가로등을 설치하자고 할 작정이었지요. 아마도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찬성할 것이고, 몇 날이 지나면 이 마을엔 가로등이 설치되어서 밝고 안전한 밤길을 맞는 게 이야기 진행상 맞을 겁니다.
그런데 마을회의장으로 향하면서 몇몇 사람들에게 다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답니다. ‘가만있자. 만일 내가 가로등이 필요 없어서 그 비용을 낼 수 없다고 해도 어차피 누군가 비용을 내서 가로등을 설치할 테고, 내가 돈을 안 냈다고 해서 그 곳을 못 지나가게 하거나 가로등을 끄지는 않을 테지…, 좋았어! 그렇게 해보자!’ 라고 생각했답니다.
가로등이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만 나 아니라도 누군가 설치할 건 분명했으니까요. 이윽고 회의장에 사람들이 모였고,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가로등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말했더니 다른 사람도 하나 둘씩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 굳이….” 이야기하기 시작했겠지요. 누구나 필요하기에 안건에 쉽게 동의할 줄 알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먼저 이야기하고 몇 사람이 동의하니 의외로 반대가 많은 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번에 다친 철이아빠마저도 “서로가 조심하면 될 문제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안건은 철회되었습니다. “각자 조심하자.”고 하면서 말이지요.
가로등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어두운 밤길에서 사람들은 빈번히 다쳤습니다. 다 본인들이 ‘조심’하지 않았거나 원체 재수 없는 사람이지요. 사람들은 해질 무렵마다 아이들 단속하기에 바빴답니다. 영희가 땅거미가 질 때 숙제를 물으러 철수한테 갔다가 “밤길 무서운 줄 모르고 싸질러 다닌다.”며 엄마한테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아 서럽게 울어 대는 소리가 동네를 썰렁하게 휘감았지요.
이기심의 시야를 달리 보면
세상이 각박합니다. 사회 양극화는 심해지고, 구조조정 소식은 우리의 내일을 불안하게 합니다. 나까지야 어찌어찌하여 ‘정년’까지 견딜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대로 두면 점점 더 어려워질 우리 아이들의 미래, 친척들의 걱정, 조카들의 구직난, 친구들이 당한 구조조정 소식에 마음이 무거워져 마음대로 웃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옳다는 길로 줄달음치는 것이겠지요. 이 마을에서 가로등 설치를 반대한 사람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달리 보면 자신에게도 마을 공동체에게도 결국 이익이 되지 않는 경우를 맞이합니다. 세상이 어려워지고 각박해진 탓은 그런 연유도 있겠지요. 나만 챙기면 내가 불안해집니다. 주위가 편안해야 나까지 편안해집니다. 우리가 겪었던 세상의 경험이 모두 그런 것 아니던가요.
우리가 개인에서 공동체로, 세상으로 시야를 넓혀야 하는 이유는 결국 ‘포위당하지 않으려는’ 나를 위한 일일 것입니다. ‘이기심’은 그 자체로 ‘악’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이기심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문제해결’이 달라진다는 것이겠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KTX·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의 외주문제에 우리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타 직종에 닥치는 구조조정에 우리의 시각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의 이기심을 어떻게 달성시키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마을의 사례는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서 참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