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대충 공직 관행 '횡령 괴물' 키웠다
[중앙일보 이철재] 국내외 희귀화폐 15억원어치 수집, 3억원대 술값, 2억5000만원짜리 별장, 1000만원어치 만화책 구입….
국고 28억8200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1일 경찰에 구속된 건설교통부 6급 공무원 최모(32)씨가 빼돌린 돈으로 흥청망청 쓴 내역이다.
9월 1일자 10면
최씨가 '횡령 괴물'이 된 배경에는 '대충대충식 공직사회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7일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회계 시스템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엉뚱하게 쓰였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고 말했다.
◆ 허술한 예산 관리=최씨는 경찰조사에서 "들통이 안 날 것으로 자신했기 때문에 범행 당시 하나도 안 떨렸다"고 진술했다. 최씨의 자신감은
부실한 회계 시스템에 있었다. 2000~2002년 당시 최씨가 근무했던 철도청 서울건설사업소(현 철도시설공단)는 경부선 수원~천안 구간
확장공사와 관련한 시설물 이전 비용으로 연간 200억원 이상을 썼다.
그러나 첨부서류가 간단하고 감독자의 결재나 경리부서의 확인업무가 형식적이었다. 최씨는 있지도 않은 도시가스배관 이전 공사를 한 것처럼
가짜서류를 꾸며 비용을 청구하는 수법으로 2년간 네 차례에 걸쳐 공사비 28억여원을 챙겼다.
최씨는 가스배관 등 지하 시설을 옮기는 공사의 경우 비용의 90%가 개산급(액수가 확실하지 않을 때 대략적인 돈을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정산하는 방식)으로 지급되는 점을 노렸다. 개산급의 사후 정산절차가 엉망이란 점을 계산에 넣고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경리부서는 최씨로부터
법인등기부 등본.법인 인감 등 기본적인 서류도 받지 않은 채 거액을 내줬다.
나중에 관련 서류가 없어지거나 이상한 점이 발견돼도 대충 '숫자만 짜맞춰' 넘어가는 관행이 부서 내에 팽배했다고 한다. 실제로 최씨가
속했던 부서는 하루짜리 국내 출장비용으로 100만원을 타내는 등 연간 출장비만 10억원을 책정할 정도로 예산 수립과 결산이 엉망이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 헤픈 돈 씀씀이 자랑=철도대학을 졸업하고 98년 철도청에 8급 공채로 입사한 최씨는 처음엔 조용하고 성실한 근무 태도로 평이 좋았다.
그러다 '대충 넘어가는 관행'에 물이 들고 횡령까지 하기 시작하면서 생활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17평짜리 빌라에서 부인, 두 자녀와 함께
살던 최씨는 거액을 챙긴 뒤 호화판 인생을 즐겼다. 특히 평소 꿈꾸다 돈이 없어 못했던 희귀 화폐 수집에 푹 빠졌다. 최씨는 횡령한 돈 중
자그마치 15억원이나 희귀 화폐를 사들이는 데 썼다. 최씨가 이베이.옥션 등 국내외 경매 사이트에서 사모은 주화와 지폐는 2t 분량이다. 경찰이
압수한 최씨의 화폐 가운데는 개당 100만원이 넘는 로마시대 금화.은화 등도 있었다.
또 경기도 용인시에 대지 150평, 건평 60평 규모의 전원주택을 2억5000만원에 산 뒤 방 6개 중 3개를 각종 수집품으로 채웠다.
만화책(1000만원)과 비디오테이프(400만원)를 사모으는가 하면 지하엔 미니바.당구대를 설치해 가족, 동료들을 불러 파티를 벌였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서울 강남 룸살롱을 드나들며 하루 최고 1000만원을 쓰는 등 술값이 3억원을 넘었다. 술집에서 사귄 여자친구에게
생활비로 3000만원을 줄 때는 사업가 행세를 했다. 현재 그의 수중에 남은 현금은 2000만원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직장 동료와 상사 등 20여 명의 공모 여부를 수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