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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사설]좌파에 대한 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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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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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5월 02일 17시 46분 3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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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에 대한 예의
오월이다. `사랑이 눈 뜨는 시절.' 시인 하이네의 노래다. 하지만 오월의 사랑은 마냥 푸르지만 않다. 오월, 그 첫날은 차라리 핏빛이다. 노동절의 기원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촉구한 집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적 모임에 미국 경찰은 사제폭탄을 던졌다. 200여명이 죽고 다쳤다. `공권력'은 폭동을 노린 자작극이라며 노동자들을 되술래잡았다. 노조간부들을 체포했다. 사형을 언도했다. 처형했다. 최후진술에서 한 노동자가 당당히 외쳤다. “만일 당신이 우리를 처형해 노동운동을 쓸어버릴 수 있다면 목을 가져가라! ”
그렇다. 오늘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8시간 노동제에는 핏빛 투쟁이 배어있다. 세월이 흘러 프랑스는 법정노동시간이 주35시간이다. 이 땅은 어떠한가. 노동시간 길기로 세계 1위를 다툰다. 그럼에도 언론은 주5일 노동제가 `시기상조'란다. 파업을 푼 노동자들을 줄줄이 감옥에 가두거나 `무릎꿇고 살기'를 강요한다.
반세기동안 신문·방송의 세뇌로 여적 노동운동은 좌파이고 좌파는 `빨갱이'다. 좌파는 반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란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역사는 정반대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8시간 노동이 그 실례이다. 좌파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벅벅이 살인적 노동에 시달릴 터이다. 노동조합 자체도 좌파가 몸을 던져 싸운 결실이다. 노동자에 늘 도끼눈인 신문·방송의 기자들도 노조를 만들고 시간외수당을 받고 있는 한, 좌파에 빚지고 있다.
우리가 무람없이 누리는 모든 민주제도의 밑절미엔 좌파의 피무덤이 있다.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다. 수구세력은 물론 보수세력이 좌파에 경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예의를 표해야 할 또렷한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 좌파는 힘있는 정치세력을 내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좌파라는 말의 시민권조차 온전히 확보 못했다.
노무현 바람이 좌파는 아니되 아름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다수 윤똑똑이들이 민주당 후보엔 이인제, 대통령엔 이회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을때 민중은 바람을 일으켰다. 수구정치·수구언론이 그 바람을 좌파로 덧칠하는 건 `필연'이다. 대통령선거일까지 무장 세련되고 집요한 방법으로 색칠을 더할 터이다. 좌파가 아닌 이를 좌파라고 언죽번죽 왜곡하는 저들에게 좌파에 대한 예의를 촉구한다면 과분한 요구일까.
다만 노 후보는 다르다. 색깔공세와 지역감정으로 찌든 나라에서 벗어나고픈 민중의 갈망이 바람을 일으켰기에 더욱 그렇다. 색깔론이 불거지자 노 후보 쪽은 진보정당을 `시대착오'라고 규정했다. 그런 말을 한 상황을 전혀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예의를 지킬 일이다. 영국 노동당,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이 죄다 시대착오 정당인가. 만일 노 후보가 색깔공세를 방어하는데 급급해 `개혁색깔'을 잃는다면, 그만의 비극이 아니다. 모든 게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수구언론의 공세에 정치노선이 시나브로 변질된 정치인 김대중이 산 교훈이다.
김대중 정권 아래서 이 땅의 노동자들은 배신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노동자들의 곧은 목소리가 공론화 안되는 근본원인은 일차적으로 수구정치·수구언론에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진보정당을 힘있게 꾸리고 진보언론을 키워갈 주체는 바로 대한민국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에게 힘이 있을 때 민주주의도 개혁도 꽃필 수 있다.
`8시간 노동' 싸움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노동자의 호소는 당시 전 세계 민중의 앙가슴에 불을 댕겼다. “너희가 불꽃 하나를 짓밟아 끌 수는 있다. 그러나 너희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노동절을 맞아 지상의 모든 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스스로에 묻는다. 그 불꽃은 오늘 우리 가슴에 여울여울 타오르고 있는가. 그 핏빛 사랑에 우리 눈뜨고 있는가.
손석춘 논설위원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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