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철도노조 노동절날 결의대회 열고 합의이행 및 여승무원직접고용 촉구예정
116주년 세계노동자대회가 5월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열린다.
이날 대회는 오전 10시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열리는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한마당을 시작으로 11시 부문마당, 14시 연맹별 대회 및 거리행진 15시 세계노동절대회의 순으로 진행된다. 노동절 대회에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쟁취 ▲무상의료무상교육쟁취 ▲노사관계로드맵폐기▲한미FTA협상저지 ▲노동자정치세력화쟁취 ▲531지방선거승리 등 당면과제의 쟁취를 위해 총력투쟁을 선언할 예정이다.
이에앞서 철도노조는 오후1시 서울역광장에서 노사합의 이행및 KTX여승무원 직접고용쟁취를 위한 철도노동자 결의대회를 연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철도노조는 4월1일 단체협약 체결이후 합의이행에 소극적인 공사측에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또 두 달 가까이 총파업 투쟁을 전개중인 여승무원투쟁과 함께하고 직접고용을 촉구할 예정이다.
결의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진중화조직국장은 “합의이행없이 징계만을 강행하려는 공사가 문제”라 말한다. 진중화국장은 “공사가 합의이행을 위한 구체적 이행일정을 내오지 않는다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또 “감사원장의 지적처럼 여승무원을 직접고용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4월1일 철도노사는 단체협약을 체결했지만 합의이행에 필요한 실무협의에서 공사측은 구체적 일정제시를 외면하고 있다. 특히 지난 25일 철도노조는 합의이행을 요구하며 징계위가 열리는 대전청사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 결의대회에는 1천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할 예정이다. 또 철도노조는 집회 후 서울시청까지 행진해 노동절대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 |
노동절, 하루 쉬는 이유나 알자!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남북전쟁이 끝난 18세기 후반의 미국은 이민노동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어 독점 자본가가 탄생하는 등 재벌들의 천 국이었다. 부자들은 강아지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 주거나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유행을 즐겼고 이빨에 다이아몬드 장식을 박는가 하면 애완용 원숭이의 시중을 하인들이 들도록 했다.
반면, 노동자들은 하루에 14-18시간씩 일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들은 동물 우리와 같은 판자집에 모여 살았다. 당시의 신문 '포스테 리아 델레스'에 실린 노동자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수백만의 사람들은 매우 비좁은 빈민가에서 비참한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노동자의 가족들은 동물적인 굶주림과 헐벗음의 수렁에서 간신히 생명만 이어 갈 뿐이다. 그토록 작은 보수를 받기 위해서 그토록 오랜 시간 노동하는 수많은 대중, 그들의 지위는 자본가들이 누리는 번영에 비추어 비극적인 이변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한 노동운동가의 동생은 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억했다.
"형님은 옷이 낡아 헤져 입을 수 없을 때까지 입었다. 죽는 날까지 걸 치고 있었던 그의 외투는 노동조합조직을 권유하러 방문했던 주물공장에서 튄 쇠똥 때문에 뚫린 구멍투성이었다."
1880년 초부터 8시간 노동 요구가 확산되었다. 2만8천명의 '노동자 기사단'이 조직되었고, 1886년에는 그 숫자가 70만명으로 불어났다. 불 경기로 실업자가 많아지고 빈곤은 심화되고 임금은 오히려 인하되었다.
1883년에 국제노동자협회가 조직되었고 '8시간 노동제'를 위해 전력투구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8시간 노동제 쟁취 움직임은 세계 각국으로 번졌고, 미국 캐나다 노동총동맹연차총회에서는 1886년 5월 1일을 기 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총파업 전개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1885년에 철도와 광산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급속히 확산되자 자본가들은 파업을 봉쇄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무장을 시키고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그 당시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 했던 신문의 기사를 보자.
- 뉴욕 트리뷴 - "이 야만적인 종자들은 몽둥이의 힘 밖에는 무서운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것만 두고두고 기억나게 해주면 된다."
- 시카고 타임즈 - "노동조합원들에게는 수류탄을 던져 혼구멍을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파업 참가자들도 겁을 먹고 잠잠해질 것이다."
1886년에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되었고, 이 연맹은 설립규약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하나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투쟁은 압제자에 대한 피압박자의 투쟁이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투쟁이다. 이 투쟁 은 또한 필연적으로 해가 거듭할수록 격렬해질 것이다. 이러한 투쟁에 서 노동자들이 사회 이익의 증진과 보호를 위해 굳게 단결하지 않는다면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결국 엄청난 재앙에 부딪칠 것이다."
운명의 5월1일이 다가오자 자본가들은 8시간 노동제 추진운동을 "비미국적"이라고 단언하고 "노동자들의 소란은 외국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때문이다. 5월 1일이 되면 노동자들의 폭동때문에 모든 것이 파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카고 신문에서는 "이 공산주의 놈들을 가로등마다 매달아 죽여야 한다."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또 자본가와 결탁한 일부 노동 귀족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8시간 미치광이'가 되었다. 5월1일이 서서히 다가오자 대회 개최와 결의문 발표 및 시가행진이 잇달아 일어나고 횃불 행진을 하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드디어 5월 1일이 밝았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구두' (이미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공장에서 만든 제품)를 신고 '8시간 담배'를 피우며 깨끗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온 가족이 거리에 나와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 행진을 벌였다.
- 노래 - 우리도 햇볕을 보고 싶다네 꽃냄새도 맡아 보고 싶다네 하나님이 내려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 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해보세
이 과정에서 대략 20만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으나, 자본가들의 반격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5월 3일, 자본가들의 사주를 받은 경찰과 군대가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했다. 5월4일 항의시위대 30만 명이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항의집회를 하던 중 폭탄이 터져 200여명의 노동자가 부상당하거나 죽었다.
이후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총파업으로 얻어 낸 8시간 노동제는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수백명의 노동자가 체포당하거나 처형되었다. 파업 지도자 7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중의 한 명인 스파이즈는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 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그러면서도 해방되기를 애타게 원하고 있는 수천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 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노동운동의 불꽃은 끊일 줄 모르게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을 것 이다."
1889년 7월, 세계 20여개 나라의 노동운동 지도자 400여명이 참가한 '국제노동자대회(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인 '파리 총회'에서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세계에 알리고,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매년 5월1일을 국제적인 노동자의 명절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그 약속을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지키는 데에는 또다시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과 1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5월1일을 오늘 우리가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지키는 것이다.
![]() |
우리나라 노동절의 역사
1) 1923년, 한국 최초의 노동절 행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 노동 총연맹'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전세계 노동자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최초로 가졌으며, 그 후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다.
2) 해방, 전평 깃발아래에서의 노동절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1945년 결성된 '조선 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히 가졌다.
3) 날짜도 이름도 빼앗긴 노동절
① 이승만정부하에 대한노총이 주관하는 노동절
미군정과 대한노총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폭력적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이후 전평) 파괴로 수많은 조합원이 해고되고 검거되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정치색을 띤 노조는 일체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마침내 전평을 불법단체로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미군정의 지원아래 대한노총이 1948년부터 58년까지 노동절 행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노동자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아온 노동절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② 대한노총 생일인 3.10을 노동절로
1957년 이승만정부의 지시로 대한노총은 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변경한다.
"3월 10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게 된 것은, 과거 5월 1일 메이데이를 경축하여 왔으나 이는 적색 공산 국가들간에 공통적으로 기념되는 날로서 오직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의 노동자 대표들은 폭압하고 잔인무도한 공산도당과 같은 날에 함께 즐길 수 없다는 의도하에 .... 대한의 참다운 민주 노동자들의 총결집체인 대한노총을 창립한 3월 10일을 한국의 노동절로 축하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한국노동운동사}, 한국노총 출판
③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로 이름마저 바뀌고!
4월의 함성으로 이승만 정부이 무너지고 5.16 군사구테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박정희정부는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마저 '근로자의 날'로 이름을 바꿨다.
4) 다시 되찾은 메이데이
1989년 제100회 메이데이 기념대회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5.1절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1989년 삼엄한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연세대학교에 모인 전국의 5천여 노동자와 청년들은 전야제를 갖고 4월 30일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1990년 경찰의 원천 봉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서 3,000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15개 지역, 250여 노조에서 노동절 기념식이 열렸다. 1990년의 노동절 투쟁은 KBS 노조의 파업, 현대 중공업 골리앗 투쟁과 맞물려 5월 1일부터 4일까지 29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명이 참여하는 5월 총파업 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1년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명이 참가한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 14개 지역에서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세계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1년의 노동절 투쟁은 5월 9일 총파업과 강경대 열사,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5-6월 대투쟁으로 발전해 갔다.
1992년에는 한양대에서 2만여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된 것을 비롯해서 전국의 13개 지역에서 세계 노동절 기념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3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하여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 행진을 벌인 것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가운데 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1994년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 우리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쟁취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을 개정하였다.
정부가 노동절 기념일을 바꾼 것은 그 동안 노동절 대회를 힘차게 벌여온 우리 노동자들의 힘과 요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되찾은 5월 1일 노동절은 우리의 지난 6년간의 소중한 투쟁 성과인 것이다.
1994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하고 대학로까지 행진을 전개하였다.
1995년은 서울대학교에서 약 2만여 노동자가 모여 기념대회를 했고 보라매공원까지 행진하여 마무리 집회를 개최하였다.
1996년 5월 1일 세계노동절 106주년을 맞아 서울, 부산, 대전, 광주, 전주, 청주 등 전국 6개 도시에서 동시에 노동절 기념대회를 열고 96년 임단투 승리와 노동법 개정, 민주노총 합법성 쟁취,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포하였다.
1997년 서울을 비롯한 13개 도시에서 10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97 임단투 승리, 재벌경제 타파 부정부패 척결, 사회개혁 쟁취, 교사·공무원 단결권 쟁취'를 다짐하였다. 장충공원에서 2만여명의 조합원이 서울중앙대회를 마치고, 마무리집회 장소인 종묘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은 페퍼포그와 최류탄을 쏘아대며 참가자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도 했다.
1998년 노동자 3만여명과 1만여명에 이르는 학생, 시민들은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노동절 집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금속노동자들이 모여있던 종로3가에 최류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참석자들은 '정리해고·파견제 철폐, 고용유지 보장, 부당노동행위 척결, 공공부문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 실업자 생활보장, 재벌개혁, IMF재협상'을 요구하였다.
1999년 '세계노동절 109주년 총력투쟁 승리를 위한 전국노동자대회'가 5만여명의 노동자, 시민, 학생이 '구조조정·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하며 서울역에서 대회를 열였다.
2000년 세계노동절 110주년대회는 서울역에 2만명을 비롯해 전주, 광주, 포항, 부산, 양산, 구미, 원주, 경주 등 전국 9개 도시에서 6만여명의 조합원이 모인 가운데 '세계 노동절 110주년 기념 대정부 교섭 촉구 및 총파업 투쟁 결의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민주노총은 대회에서 △주5일근무제 실시 △자동차산업 해외매각 중단과 협동조합 강제 통합 중단 △임금 15.2% 인상과 외환위기 동안 후퇴시킨 단체협약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철폐와 정규직 전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예산 GDP 기준 10% 확보를 촉구하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5월 31일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2001년 세계노동절 111주년 대회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4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제주, 원주, 포항 등 전국에서 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