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문득 묻는다
어느덧 소주 한 병을 비워 간다. 술 한 병을 더 시키며 주위를 돌아본다. 붉은 얼굴의 젊은 남녀쌍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웃고 있다. 왠지 내 자리가 초라해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료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다. 그래서 못 다한 싸움이라도 할 걸 그랬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묻는다. 혹 내가 변한 것은 아닌가? 세월의 소용돌이에 나의 몸이 낡고 맘이 닳아버린 것은 아닌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넘치는 생산으로 남을 사랑할 수 있다 했는데, 나는 사랑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뿐, 정작 나를 보살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를 버려둔 채, 나를 잊은 채 너무도 오랫동안 외길을 달려왔구나. 직장 핑계로 너무 가족을 소홀히 해 왔구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동료를 너무 몰아붙였구나.
나를 잊은 채 외길 달려와
기둥에 걸려 있는 라디오에서 정태춘․박은옥의 <정동진>이 흘러나온다. “텅 빈 대합실의 유리창 너머 무지개를 봤지 / 끝도 없이 밀려오는 파도 그 바다 위~~” 피끓는 저항의 소리를 노래했던 정태춘의 노래가 박은옥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려 고요하다. ‘아니다’와 ‘하지 말자’의 부정의 소리가 가라앉고 그는 이제 긍정의 무지개를 본다. 본다? 보이기는 한단 말인가, 희망이? “소나기 지나간 정동진 철로 위로 화물열차도 지나가고, 파란 하늘에 일곱 빛깔로 아련한 얼굴 가슴 저미는 손짓으로~~” 차가운 철길 위를 달리는 무거운 기차는 그 가슴에 뜨거움을 품고 있었다. 예전의 나처럼! 정태춘은 보았단 말인가, 이육사가 <절정>에서 노래한 ‘강철로 된 무지개’를? 회색 철로가 일곱 빛깔을 머금었단 말인가? 철의 노동자의 가슴은 이미 녹슬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아련한데. 생각만하면 가슴이 저미는데. 상념에 잠기는데, 노래는 흘러간다. “소나기 지나간 오후 중앙로, 철교 아래 그 비를 피하던 네가, 파란 하늘에 일곱 빛깔로, 그리운 것이 저리 멀리 아니 가까이, 차마 다시 뒤돌아서 그 쌍무지개를 봤지. 텅 빈 객차 달려가는 그 하늘 위~~.”
그리운 것들이 저 멀리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처럼 가까이 있구나. 내 속에 이처럼 선명하구나. 나는 나를 이제 본다. 나는 좌절과 절망만을 쌓아온 것이 아니라, 그리움과 희망도 쌓아온 사람. 불화와 싸움만을 한 것이 아니라 연대와 사랑을 해 온 사람.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물러서지 않겠다고 앞장 서 왔던 것만이 아니라, 뒤돌아 지친 사람을 위로하고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웠던 사람. 분노가 아니라 사랑을 생산하는 사람. 지옥에서 천국을 꿈꾸는 사람.
나는 그리움과 희망도 쌓아온 사람
열차가 저 몸무게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전진해야 하듯이, 나도 나의 삶을 살아야겠다. 철로의 평행선이 불화의 모습이 아니듯이, 저기 달려가는 동료가 나와 같은 방향임을 믿어야겠다. 나를, 나의 가정을, 나의 동료를 긍정하자. 그 긍정의 힘으로 내일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남은 소주를 단숨에 비우고 나는 포장마차를 빠져나온다. 바람이 분다. 가슴이 훤하다. ‘사랑한다’라고 조용히 소리 내어 본다. 붉은 눈에 눈물이, 입가에 웃음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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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한 사랑은 생산성의 표현이며, 보살핌과 존경의 책임, 그리고 지식을 포함한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한, 사랑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능동적으로 갈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실현이며 집중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적인 긍정은 본질적으로 인간 성질의 구현으로서 사랑받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내 자신의 자아는 다른 사람처럼 내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의 생명과 행복, 성장과 자유에 대한 긍정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즉 보살핌과 존경과 책임 그리고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개인이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 또 그가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철도노보’ 제 55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