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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찬 선배는 출근을 하기 전 부모님 선영에서 인사를 드리고 동료의 산소를 찾아갔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전기협의 동지들이 파면되고 지부가 극심한 탄압으로 숨도 못 쉬는 상황에서 박세철 동지가 지부장에 출마하였다.
박세철 동지는 동지들의 해고로 생활고에 시달리자 해고자 구호를 위한 모금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러나 소청심사위원회에서 기각되었지만 재징계로 전출되어 출근하던 중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연제찬 선배는 박세철 동지의 무덤에서 너무 미안하고 슬퍼 혼자서 많이 울고 왔다고 한다.
출근하는데 딸이 “이제는 학자금이 나온다며 친구들을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고 했다. 처음 놋지를 잡았을 때는 너무 떨렸다고 한다. 연제찬 선배가 첫 열차를 탈 때의 지도기관사는 해고 되기전 선배가 지도기관사로 가르쳤던 후배인데 나를 지도하는 기관사가 되어 감회가 너무 깊고 뿌듯했다고 한다.
출근을 하면서 현장이 너무 변한 것이 인상이 깊은 모습이다. 94년 당시 요구했던 것들을 후배들이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것을 보고 고맙다고 말한다. 앞으로 철도노동자에게 큰 시련이 찾아와도 슬기롭게 극복할 것 같다며 싱글한 미소가 입가에 묻어난다. 대전기관차에 와서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반은 철도를 떠나 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기관차 조합원들이 대전역, 서대전역, 조차장으로 나누어 출근하여 함께 일할 때의 시끌벅적했던 옛 시절이 많이 그리운 모습이다.
남들이 복직할 때 자신은 원직복직을 고집하여 주변에서 말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김운철(부산기관차 해고복직) “너라도 남아서 원직복직을 이루어 달라는 말이 무척 힘이 되었다” 고 한다. 연제찬 선배는 이제 인생에 커다란 짐을 하나 풀어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어색한 짐을 풀지 못하는 것은 남은해고자의 복직과 후배들이 철도 무사히 다닐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며 또 다시 짐을 지게 되었다.
대화를 하는 내내 지켜보았던 대전기관차의 한 조합원은 “이제 해고자가 현장으로 돌아와 이제 대전기관차의 아픔을 떨쳐 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며 조합원들은 연제찬 선배의 복직으로 가슴에 남은 돌덩어리를 내려놓게 되어 대전기관차가 예전의 정겨운 모습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투쟁을 할 것 이냐는 질문에 연제찬 선배는 “조합원으로서 선배로 책임을 다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연제찬 선배는 “ 열심히 생활하여 전체 해고자에게 누가 되지 않고 대전기관차 조합원들에게도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