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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만 되면 나는 친구의 철도 패스를 빌려서 아무 기차에나 올라탔다. 그 무렵에 철도 공무원들은 아무 기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패스를 갖고 있었다. 순천을 지나 괴목, 구례구, 압록, 곡성, 남원… 기차는 철길을 따라 나를 세상으로 실어 날랐다.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이 패스만 가진 채 나는 기차가 멈춘 아무 데서나 내려 발이 아프도록 걸었다. 낯선 땅의 낯선 냄새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낯선 거리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된 기분으로 다시 낯선 역으로 돌아왔다.
역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였다. 딸네집에 왔다가는 노인네들, 다시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가는 까까머리 학생들,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연인들, 키들거리며 수작을 주고받는 젊은이들…. 나이 들수록 이별에 마음이 쓰이지만 그때 나는 십대였고, 이별보다는 떠남에 가슴이 설레었다.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기차역이 그래서 좋았다.
어느 겨울, 지금처럼 날아갈듯 한 기와지붕으로 바뀌기 전의 전주역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곽재구의 시에서처럼 톱밥난로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고, 김이 뽀얗게 서린 창밖으로는 눈이 퍼붓고 있었다. 난로와 떨어진 맨 뒷자리에 앉아 남자의 오바를 무릎에 덮은 채 그 안으로 살며시 손을 잡고 있던 젊은 연인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전 처음 온 낯선 역에서 밤차를 기다리며 나는 상행선이 도착할 때마다 유혹에 시달렸다. 상행선의 종착역은 서울역. 저 기차를 타면 서울에 갈 수 있으리라. 그곳에 가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이 지루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눈이 퍼붓는 겨울 밤, 하얀 수증기를 내뱉으며 멀어지는 기차를 나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지금도 간혹 기차를 타지만 예전 같은 풍경은 사라지고 없다. 더 이상 기차는 수증기를 내뿜지 않는다. 용산역에서 10시 50분에 출발하여 여름의 이른 여명이 밝을 즈음 남원 부근을 달리던 완행열차도 사라졌다. 덜컹덜컹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에서는 여명이 밝자마자 일하러 나온 늙은 농부의 주름까지도 환히 보였었는데, 지난해인가 두 시간 반 만에 부산역까지 나를 실어 나른 KTX에서 창밖의 풍경은 산뜻하고 빠르게 스쳐갔다.
내 청춘의 기차를 나는 평양역에서 다시 만났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박고 평양거리를 구경하던 나는 잠시 내 눈을 착각했다.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혹 기차를 놓칠까 새벽부터 서둘러 나온 것인지 웃통을 벗은 채 누런 러닝셔츠 차림으로 역 앞 가로수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노란 양철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은 앙상한 그 등에 울컥 가슴이 뜨거웠다. 평양의 가난에 한숨을 내쉬다 말고, 나는 내 유년의 가난이 가슴 저미게 그리웠다.
기차가 뒤로 가지 않듯 시간은 뒤로 흐르지 않는다. 그 시대도, 나도, 기차도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 정지아는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89년 전작장편 『빨치산의 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으로 『행복』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