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지켜온 일터를 떠나야 하는 마음에서인지 구석진 그림자가 주름살을 감추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자신이 지켜온 철길만큼 여유와 웃음이 묻어난다. 결코 부끄럽지 않게 철길에 흘린 땀방울만큼 값진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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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설사무소 범일선로반 김상도 수장님 |
삼수 끝에 들어온 철도생활이 나에게 운명이었다
선배님은 철도에 삼수해서 들어왔다. 농사를 짓다가 당시 반야월 분소장으로 일하는 형님의 권유로 들어왔는데, 세 번 떨어진 끝에 합격하여 부산진 선로반으로 처음 발령을 받았다.
당시 시험은 부산정비창에서 80킬로그램 침목을 메고 400미터를 걷는 것이다. 두 번째 시험은 당시 간수를 뽑는 시험인데 부산고에서 치렀고,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었다. 그리고 11월 다시 지원하여 침목을 억지로 메었다.
선배님은 76년 11월 20일 합격하여 1주일 직무교육을 받고 2주 현장교육을 받았는데 18개월 만에 당시 부두선로반에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선로반에서 ‘너 누구 빽으로 들어왔냐?’고 하며 부산선로반으로 6개월간 조근을 보내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월급 2만 8천 원, 오백 원짜리로 받아
첫 봉급을 묻자 수장님은 “당시 쌀 한가마(80kg)에 8천원에서 만원했는데 본봉이 2만 8천 원에 수당까지 합쳐 3만 8천 원이었다.”며 그때는 월급을 5백 원짜리 지폐로 받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세 다발씩 가져가는데 나는 한 다발도 안 되더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우리 때부터 보너스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군 경력 3년이 인정되었다.”며 “반장하라고 해서 13년간 반장을 했었다”고 말했다.
선로반 일 힘들다고 철고생들 공채생들 대부분 떠나
예나 지금이나 선로반 일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당시 화차가 들어오면 인력으로 침목을 300장씩 내리고 하루에 1인당 6장을 갱환하였다고 한다. “난 힘든 농사일을 해봐서 그렇지 철고 나오거나 일반학교 나온 사람들은 거의가 다 나갔지" 철고생들은 의무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부모님이 돈을 지급하고 데려가기도 했다. 공구도 지금보다 두세 배 무겁고 차량도 없고 모든 것을 다 트로리나 호니카로 걸어서 운반하고 작업복도 두꺼워 여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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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부산진선로반 생활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로반 통폐합과 축소는 직원들에게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진 것인가 보다.
당시 부산진분소가 없어지면서 연장이 늘어나 8명이 하던 것을 11명이 했는데 순회하랴 열차감시 하랴 어떤 때는 시간이 늦어 기관사에게 이야기 하고 범일까지 열차를 타고 가야 했다. 자갈이 부서져 물은 머금고 하얗게 침목위로 올라오는 분니가 엄청나게 나서 열차 타고 가면서 윗사람이 지적을 하면 임시방편으로 폐유를 칠하고 나중에 작업을 했다.
아련한 추억으로 나가오는 괴동선로반 수장 생활
수장이 되면서 괴동에 발령받았다. 당시 부산진선로반에 있을 때 직원이 짐을 싸주면서 차에 태워주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괴동에 오니 주민은 없고 기차소리만 들리고 바닥에는 연탄가루만 수북하고 정말 장난이 아니라며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일해야 하는지 수없이 되묻곤 했다.”
직장에서 일하며 동료의 주검을 보는 것이 못할 짓이다
“일하시면서 다치신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부수장 시절 재료 실으러 모터카 타고 가면서 전철기를 넘기고 다시 모터카를 올라타다 바퀴에 엄지발가락이 잘렸다. 46일간 병원에 입원했는데 발가락에 습진이 생겨 고생했다고 한다. 故 김삼수 수장의 순직은 지금도 참담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며 “선로 가에 담요를 덮어놓은 모습이 너무 허무하고 참담했어. 상여를 수장들이 메고 갔는데 내내 눈물이 나오더라고”말하는데 수장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장님은 “나보다 8년이나 일찍 수장도 되고 등급도 빨리 올라갈 정도로 열심히 일했는데 순직했다”며 직장에서 동료의 주검을 보는 게 정말 못 할 짓이라고 말했다.
매실의 추억 지울 수 없는 원동선로반 시절
원동선로반에 있을 때 방송국에서 나와 선로반 사람들 일하는 것을 촬영했다. 수장님은 일부러 꾀죄죄한 옷으로 입고 검게 그을은 주전자를 들고 평상시보다 더 먼지도 많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다.
원동매실은 알아준다. 선로반에서는 매실을 사무소에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수장님은 사무소에 보내지 않고 선로반 동료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그런데 매실을 사무소에 보내지 않아 집이 가까운 부산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 소문으로 들렸다. 그래서 동네에서 구입한 매실을 사무소에 보냈는데 정말 부산으로 발령이 났다. 나중에 사무소장이 매실을 잘 받았다고 매실주를 마시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매실이 큰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원동매실을 알아주는 것은 맞는 것 같다고 웃으신다.
철도원 생활을 하면서 자식 키우고 장가 보내
76년 시골에서 함께 올라와 당시 수정5동에 있는 30만 원짜리 전세에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부부싸움은 그때 부인이 아기를 자꾸 울린다고 싸운 것이 전부다.
수장님은 “다행히 공부도 나를 닮아서 잘 할 것 같지 않았던 두 놈이 대학 나와 직장 정규직으로 취업해서 장가도 가고 직장생활 충실히 해서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공사로 바뀌며 정년이 1년 연장되어 더 근무하게 돼 기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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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님은 새벽에는 헬스를 하러가고 8시20분경 출근하면 일일점검, 그리고 출근체크, 안전교육 등을 시키고 현장을 간다. 요즘 고민은 자꾸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고민이라며 서른아홉 때 춤을 배워 부인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퇴근하면 주로 TV 보고 오락도 하다가 초 저녁 잠이 많아 일찍 잠을 잔다.
퇴직하면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다. 수장님은 “철도에서 근무하다 정년 하면 오래 못 산다”며 “실제로 퇴직 후 10년 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기뻤던 일들 그리고 이제 바람이 있다면
승진되었을 때 좋았던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수장시험에 11명 뽑는데 2등 해서 수장 되었을 때라고 한다. 무엇보다 즐거웠던 일은 아들이 장가가서 며느리가 제사상을 차릴 때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쁜 일이라고 한다. “아버님 어머님 손주가 장가가서 며늘아이가 차려준 상이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나더라.”며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다
76년에 부산 와서 82년 천삼백만 원에 슬레이트집을 하나 구입했다. 처음 올 때 30만 원짜리 전세인데 아버님에게 35만 원이라고 하고 5만원 챙겨먹었다며 멋적게 웃으신다. 꾸준히 적금 붓고 돈을 모았다. 이사 다닐 때 서러움도 많았다. 당시 부수장과 직원들이 와서 이삿짐 하나씩 둘러메고 비가 억수같이 올 때 이사하던 시절이 기억난다며 “비오는 날 이사 가면 잘 산다고 덕담을 해 주더라”며 87년 2층집을 지었을 때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고 한다. 수장님은 철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철도가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며 “퇴직자에 대한 우대가 있었으면 한다. 반평생을 철도에서 보냈는데 노조창립기념일이나 철도의 날 퇴직자들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후배들도 나처럼 정년퇴직 했으면 좋겠다.”
끝으로 수장님은 앞으로 철도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며 “나 같은 사람은 정년퇴직을 하면 그만이지만 후배들도 나처럼 정년을 했으면 정말 좋겠다.” 지금 젊은이들보다 그때 사람들이 더 나은 것 같아. 성실함도 떨어지고 어려움과 배고픔을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요즘은 일 끝나고 막걸리 마시며 서로간의 불만도 이야기 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부산시설사무소 범일선로반 김상도 수장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