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3월 22일‘전국노동조합평의회’는 대중투쟁을 탄압하는 미군정에 항의하는 24시간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1947년 3월 22일 18시 순천철도국노동조합 구례구분회장 정운창은 분회원을 소집했다. 역무원과 선로반과 전기 20명과 비조합원인 조역이 집결했다. 분회 임원들은 전철기를 돌려놓았다. 분회원들이 스파이크를 뽑았다. 정분회장은 분회원을 이끌고 인근 계곡으로 갔다. 전평의 지침은 24시간 총파업이었지만 구례구분회원들은 2박 3일 동안 계곡에서 닭을 잡아먹고 민화투, 육백을 치고 놀았다. 미군정에 대항하는 낭만적인 산개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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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3월 순천철도국노동조합 구례구분회장으로 대중투쟁을 탄압하는 미군정에 항의하는 24시간 총파업을 이끌었던 정운창 선생님 |
정운창 선생님은 “일본놈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너는 조선인이다”라고 가르치신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고 고향 반내골에 간이학교 설립이 추진되자 신설학교를 준공하기 위해 지게와 괭이, 삽을 지참하고 교사건축과 학업을 병행하며 41년 간이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가세가 기울자 돈을 벌러 일본으로 건너간 형이 고생만 하고 귀국하자 가족들에게 애원하여 43년 구례읍에 있는 중앙국민학교 5학년에 편입되었다.
침략 막바지에 이른 일본이 조선의 중학생까지 징병을 하려하자 일본인 교장은 고등과 2년 수료자격이 있음에도 징병이 면제되는 철도종사원 시험을 보도록 하여 45년 4월 3일 구례구역에 부임하였다. 해방 당시 철도는 남북 10만 종사원에 6만 조합원인 전평 소속의 철도노조가 있었다.
그의 첫 월급은 47원 이었다. 쌀 한가마니가 2십원 조금 넘었으니까 꽤 괜찮은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할 수 없었다. 미군정은 일본으로 쌀을 밀반출 하면서도 국내에는 쌀을 풀지 않았다. 암시장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취업 후 그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의 영향으로 ‘나라를 구할 곳은 노동운동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곧 행동으로 옮겼다.
46년11월에 19살 나이로 구례구분회장이 된 정운창 선생은 그 무렵 발간되어 열차 편으로 보내던 선전물들을 경찰의 압수를 피해 빼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번은 친일세력으로 미군정에 빌붙어 세를 누리던 세무원이 무임승차로 다니자 구례구역 역무원과 몇 대 쥐어 패고 열차표 끊던 가위를 던져 이마를 깬 사건도 있었다.
“쌀을 달라”는 요구를 걸고 저항에 나선 대구항쟁을 엄호하고 같은 요구를 가지고 이듬해 3월 22일 총파업의 새벽을 열었다. 이후에도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 등 활동을 하던 그는 1947년 11월 7일 입사 2년 7월 만에 지하활동을 위해 철도를 그만두었다.
“노동조합 간부는 조합원을 위해 끝없이 희생해야 하며 조합원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조합원이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철도노동조합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다.
최세영 / '철도노보' 편집팀



47년 3월 순천철도국노동조합 구례구분회장으로 대중투쟁을 탄압하는 미군정에 항의하는 24시간 총파업을 이끌었던 정운창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