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 13층에서 내려다보면 어느 새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새순들이 어린아이들의 웃음처럼 피어나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듭니다. 아파트 주변에 세워진 차량들도 얼마나 많은지 출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차량들은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혼자 중얼거려 봅니다. 돈들도 참 많다. 차가 서너 대씩들 있는가 보지? 어쩌면 저렇게 돈들을 잘 벌까? 다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구름산이 초록의 물결로 뒤덮여 있습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우리 아파트를 쓰다듬으며 흥흥거립니다.
세상이 분명 나아진 것 같습니다. 젊은 아기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며 아이와 함께 까르르 웃습니다. 풍성한 나뭇잎 아래에서 노인들이 편안한 몸짓으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노인들의 눈빛이 그 길을 따라 여유롭게 걷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슬픔이 몰려옵니다. 저 눈부신 하늘에도 슬픔이 매달려 있고, 저 아기 엄마의 웃음 끝에도 눈물이 매달려 있고, 노인들의 한가로운 눈길 끝에도 눈물은 매달려 있습니다. 평화로운 풍경들 옆에 유령처럼 흐믈거리는 또 다른 삶의 목숨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푸른 공원의 노숙자처럼 음침합니다. 배부른 사람들의 평화로운 눈빛을 더럽히는 노숙자처럼 불쾌합니다. 아니, 그렇게 보도록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우리의 눈과 귀를 돌려세웠습니다.
배부른 자들은 결코 배고픈 자들의 생을 보지 못합니다. 편안한 자들은 결코 불편한 자들의 생을 보지 못합니다. 이분법적인 위험한 생각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양심의 눈에 보이는 것은 고마운 이해 정도이지요. 돈과 물질이 우리의 온몸을 뒤바꿔버린 지금 지성도 양심도 벼랑 끝에서 바들바들 떨 뿐입니다. ‘나만이’ 라는 광고가 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라는 ‘더불어’는 깨진 유리조각처럼 위험한 대상일 뿐입니다.
날카로운 판단과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가진 어느 시인은 오래 전에 그걸 눈치 챘습니다. 예전에 ‘우리’를 부르짖었던 그는 그 모양과 색깔을 다르게 걸쳐 입었습니다.바람을 노래하라. 오래된 옛집을 노래하라. 구름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아, 저 눈부신 햇살의 그리움은 아는지. 마음을 비운 뒤 먼 산을 바라보는 허허로움은 아는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저 자연과 생명의 소리를 왜 못 듣는지. 생은 결국 먼 산 먼 길을 가는 것뿐이거늘…. 저 예쁜 꽃들을 보라. 저 숲속의 나무들을 보라. 그들이 가르쳐 주는 생의 길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다시 마음을 비우라. 느릿느릿 걸으면서 생의 아름다움과 목숨을 보라.
그런데 그 아름다운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은 내 오만하고, 뾰족한 생각의 끝 탓인지요. 그 아름다운 언어 속에 구릿한 냄새가 구더기처럼 바글거리며 욕지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역시 나는 세상의 다른 면만 고집스럽게 보는 이분법적인 인간인 것 같습니다. 내 목소리까지 살기를 품고 서럽게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시인이 죽은 시대는 암흑의 시대입니다. 평화롭고 싶습니다. 나도 하늘길을 찾아보고 싶고 오래된 옛집의 그리움을 더듬으며 잃어버린 생의 아름다움과 여유를 찾고 싶습니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먼 산 먼 길을 보고 걷고 싶고 그냥 눈에 보이는 아파트 풍경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나니, 너니, 우리니, 저들이니 하는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숲속의 세계처럼 평화롭게 나누고 싶습니다.
KTX 여승무원의 눈물을 노래하고 싶지 않고,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게 만들고, 비정규직의 분노를 외치게 만듭니다. 미군이 왜 우리 땅에 있냐고 따지게 만들고, 왜 우리가 미국을 바라보며 주눅 든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화가 치솟게 만듭니다.
그것도 나둬야 됩니까. 세월이 흐르면 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겁니까. 맑고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슬프다고 하는 내가 정말 미친 겁니까. 생의 한쪽만 바라보는 편협한 인간인 겁니까.
지긋지긋하게 슬픈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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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휘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