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기억하겠지만 거의 30년 전인 1979년에 YH무역 여공 170여명의 투쟁은 튼튼하게만 보였던 유신 독재체제를 결국 내파시키게 한 도화선이 됐다. YH무역 여공들의 투쟁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이번 KTX 여승무원들의 500일에 걸친 의거(義擧)가 노무현 정권을 퇴진시킬 일까지는 아니어도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만인들에게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참여’ ‘탈권위’ ‘시민사회’와 같은 수사로 장식된 ‘식인적’(食人的) 자본독재의 모습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세력의 ‘진보성’에 대한 소망적 사고가 섞인 일부 ‘진보 지식인’의 오판이 용서될 수 있어도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KTX 여승무원 덕분에 우리는 이제 한국의 ‘자유주의’ ‘민주화 세력’의 진상을 충분히 들여다보게 됐다.
저들이 이야기하는 ‘민주화’는 왜 새빨간 거짓말인가? 정상적 부르주아 민주국가는 그 성질상 법치국가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자본 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한다해도 적어도 ‘법’이라는 공공영역의 경계선을 넘은 자본을 혼내줄 의무가 있는 것이고, ‘법’이 허용하는 피착취자의 권익을 가시적으로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뒤에서는 아무리 ‘자본’과 ‘국가’가 동심일체가 돼도, 노동자의 요구가 일단 ‘법’의 잣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 요구를 억지로라도 들어주어야 하는 민주 법치국가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참여정부’는 그런 수고라도 하려 하지 않는다. 다단계 고용의 철폐에 대한 여승무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권위 있는 국가기관이 증명해도, 국영 기업인 철도공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법은 무슨 법, 정의는 무슨 정의? 노동자란 이윤 창출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가장 하위에 있는 요소이고, 인적 자원이 굳이 필요하다면 외주화시켜 가장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것뿐이다!”
이 사고방식은 매우 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 비현실적 요소가 딱 하나 있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소비자이기 이전에 소비할 돈을 열심히 벌고 있는 임금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피와 같은 돈을 많이 내서 KTX를 비싸게 탈 마음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알게 된다. KTX 여승무원들이 당한 외주화와 불법 해고를 그들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KTX 여승무원들이 단식을 해서 쓰러질 지경이 됐지만 내일은 바로 내가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철 사장이 아무리 ‘비용 증가 위험성’ 등을 들먹여도, 그들은 KTX 여승무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을 만큼 약간 더 비싼 표값을 내고 약간 더 많은 세금을 낼 자세가 결국 될 것이다. 물론 이철씨처럼 연봉이 많고 재산 복이 많으신 분 역시 거기에 알맞게 세금을 훨씬 더 많이 낼 것을 조건으로 해서.
이것은 ‘자선’이 아니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반한 ‘사회적 연대’다. 물론 아직 우리 중에 이와 같은 연대의식이 부족한 이들도 많다. 이철이나 노무현과 싸우는 척하는 보수 언론들이 노동 문제와 같이 핵심적 사항에서 정부와 너무나 잘 ‘연대’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런데 기만은 영원할 수 없다. 결국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이 우리 모두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널리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는 ‘참여’나 ‘개발’로 정치적 사기를 해온 이들은, 아무리 귀가 먹어도 자신의 정치적 주가(株價)가 떨어져버리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