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한겨레] 홍세화칼럼 - 노동, 그대 이름은 굴종 |
 |
 |
|
|
운영자 |
 |
 |
|
|
1043 |
 |
 |
765 / 1 |
 |
 |
|
|
2003년 07월 28일 16시 09분 21초 |
|
 |
 |
노동, 그대 이름은 굴종
노예의 반란은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주인만 바뀔 뿐 노예는 노예로 남는다. 그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새 주인이 덜 악하기를 바라는 것이 전부다. ‘선거혁명’이라고 했던가. 그것을 통해 한국의 노동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 또한 새 주인이 ‘최악’이 아니길 바라는 것뿐이다. 두산 노동자 배달호씨에겐 그런 기대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수출 역군’이나 ‘산업 전사’로서 동원 대상이 될 때에만 지배자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를 선언하는 순간, 주인과 마름들의 눈빛은 싸늘하게 바뀌었다. 자본과 국가권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국가 경쟁력’ ‘국가 신인도’ ‘투자하기 좋은 환경’ ‘국민소득 2만불’의 구호 앞에서 넙죽 엎드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말아야 한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20:80의 사회에서 10:90의 사회로 굳어지더라도 “그 국가 경쟁력, 누구를 위한 것인데”라고 계급성이 담긴 질문을 절대로 던져선 안 된다.
‘민족 증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도록 교육받은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노동자 주제에 처분만 바랄 뿐이지 ‘참여’나 ‘토론’은 가당치도 않다. ‘참여 정부’, ‘토론 공화국’에서, 참여와 토론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집단 행동을 벌였다간 구속 14명, 해고 60명, 직위해제 624명, 가압류 97억원을 당한 철도 노동자 꼴이 되어야 한다.
일찍부터 이 땅의 노동자들은 알아야만 했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길이 그나마 편히 살 수 있는 길임을. ‘1300만 노동자’라고 말하지만, 노동자 의식은커녕 스스로 노동자라고 말하는 노동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의식이 없으니 노동자 사이의 연대 의식 같은 것, 당연히 찾기 어렵다. 교사가 무슨 노동자며, 공무원이 무슨 노동자냐고 교사·공무원이건 아니건 다투어 주장했고 주장하도록 했다. 전교조 교사들이 별종의 교육 노동자들인 것은 학생들의 정보인권을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개혁’ 정권의 탄압을 불러온, 어처구니 없는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물론, 노동자 자신의 노동자 죽이기만으로는 부족하다. 광고로 먹고 사는 수구언론은 자본의 충실한 마름이 되어 노동자 죽이기에 앞장섰다. 10% 대의 노조 가입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삼성 창업자의 ‘무노조’ 유훈이 관철되는 나라를 ‘노조 공화국’이라고 떠들어댄다.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50%를 넘는 비정규직 문제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다고 열 올린다. ‘노동귀족’이라는 말로 사회 구성원들의 가벼운 귀를 간지럽히며 손쉬운 공격대상을 찍는다. 해고를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고용이 어렵단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논리 그대로다.
대기업 노조가 과녁이 된 것은 과연 그들이 강성이고, 집단이기주의에 매몰되어서인가 그것보다 감히 봉건적 주종 관계에서 벗어나 기존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면서 파업을 실행에 옮기기 때문이 아닌가 이 땅에서 노동의 이름은 ’굴종’이거늘! 권력과 자본은 답해 보라. 노동을 단 한 순간이라도 관리, 통제의 대상이 아닌, 수평적 관계로서 대해본 적이 있는지를 이 땅의 세력 관계에서 노동은 대등한 지위에 서본 적이 거의 없다. 강요된 굴종이 있었을 뿐. 노동계 일부가 보여주는 강성 이미지는 그 강요된 굴종의 일그러진 반사일 뿐이다.
이러한 노동자 죽이기에 자유주의자들도 한몫 거들고 있다. 그들에겐 근대 공화국이 자유와 평등 이념으로 봉건적 신분질서(그 ‘질서’는 신의 ‘명령’이었다)를 무너뜨리고 태어난 것이라는 점은 참조되지 않는다. 그들의 자유주의란 대개 150% ‘영업의 자유’에 약간의 ‘정치적 자유’를 조미료처럼 가미한 것이다. 현실 논리 추종 정도에 따라 약간의 편차를 보일 뿐,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배반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