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인터뷰] "네덜란드식은 안맞아"
[속보, 정치, 경제] 2003년 07월 16일 (수) 06:21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지 않으냐는 질문엔 "한가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난처한 질문에는 "토론은 체질에 안 맞는다" "나에게 묻지 말라"며 피하기도 했다.
-'성장보다 분배'를 내세우던 정부가 성장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노동계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성장과 분배 균형을 잡겠다고 했지만 최근 들어 성장 위주로 정책이 전환된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성장 위주로 가면 노동자의 희생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만큼 앞으로 예의주시할 생각입니다."
-정부가 노동문제와 관련해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 등을 주장하면서 "정당한 주장에 대해선 귀기울이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헷갈린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사실 나도 헷갈려요. '불법이라도 요구가 정당하면 귀기울이겠다''불구속 수사하겠다'고 했는데 역대 어떤 정권보다 짧은 기간에 40여명을 구속했습니다. 무슨 말을, 어디까지 믿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공자 말씀'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정책과 태도를 보여줘야지요. 매일처럼 개혁이라든지, 새로운 노동정책을 말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후퇴한 것처럼 보입니다."
-'친노동'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정부에 대해 그런 평가를 하는 것이 의외입니다. 정부의 노동정책에 기대한 점은 없었습니까.
"현 정부에서 획기적인 노동정책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친노동'으로 보는 것은 재계와 언론이죠. 노동계에서는 그렇게 평가하지 않아요. 물론 아쉬움은 있습니다. 盧대통령이 개혁정책을 펼치려면 경제단체와 언론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를 차고 나가야 하는데 그걸 못하더군요."
-대통령 개인에 대한 섭섭함인가요.
"盧대통령 개인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개인은 긍정적인 면이 있겠지만 권력의 정점에 있는 '노무현'은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은 다른 겁니다."
-권기홍 노동장관이 "노동부는 정부 내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해야 한다"고 했는데, 잘 대변하고 있다고 봅니까.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 정부 수립하고 처음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감동적이었어요. 실제로 노동부 역할은 그래야지요. 경영계는 산자부.재경부 등 유관부서 많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盧대통령이 대기업 노조가 반성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턱도 없는 소리예요.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거죠. 노동문제를 안다면서도 전혀 아는 게 아니더군요. 중소 영세사업장 노동자에 비해 대공장 노동자의 총액 임금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엄청나게 깁니다. 자동차는 12시간 맞교대에, 경우에 따라 철야까지 해요. 盧대통령의 이야기는 노동운동을 공격하고 현재의 저임금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공장 노동자의 임금을 조금 깎는다고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에게 가는 게 아니에요. 원청과 하청기업 사이의 계약관계를 개선하고 최저임금선을 높여줘야 합니다."
-노동자 스스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층을 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노노갈등도 나오고 있는데요.
"그런 지적이 있죠. 비정규직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진 정규직 노동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어요. 비정규직에 대한 성과급 지급을 단협사항으로 요청하는 사업장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예전에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규직도 얼마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경제 5단체장의 모임에서 우리의 노사관행과 이에 대한 정부의 부적절한 대응 등과 관련해 고용과 투자의 축소, 기업의 해외이전 등을 거론했습니다.
"국가 경제를 가장 염려하시는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경솔했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의 정당성을 떠나서 국민과 노동자들을 상대로 협박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노동쟁의는 완만하게 축소돼가고 있습니다. 화물연대는 특수한 문제였습니다. 이를 빌미로 노사문제 때문에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치지요."
-그런 투쟁적 관계를 상생적 관계로 전환시키자며 우리의 노사관계에 네덜란드식 모델을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토양에 맞지 않는 나무를 심어봐야 자라지 못합니다. 노사관계의 신뢰도 등에서 우리와 네덜란드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고민해야지요."
-노조의 경영참여를 둘러싼 논의가 뜨거운데, 한국에서 근로자의 경영참여에 대한 기대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노조가 경영 전반에 관해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단 고용정책이나 노동자의 인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노동자의 결정권이 보장되는 것이 맞습니다. 실질적인 경영에 대한 것은 협의 정도는 해야겠지요."
-철도파업과 관련해 공권력 투입을 예상하셨습니까.
"솔직히 예상 못했습니다. 철도 문제는 정부가 먼저 합의를 파기한 것이므로 정부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고 우리는 봤지요. 공권력이 투입된 시점도 파업 선언하고 딱 두시간 지나서였죠. 폭력사태도 없었고 학교에서 아주 평화적으로 있었는데 공권력을 투입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투(夏鬪)가 심각할 것이라고 예상됐지만 철도 파업에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 현대자동차에선 부분파업을 벌이고 산별전환도 부결됐습니다. 정권의 태도 변화에 따라 자세를 낮춘 것 아닙니까.
"글쎄, 철도파업에 공권력 투입했다고 기가 죽겠습니까. 산별과 관련해서는 현대차 조합원이 좀 괘씸하고 아쉽죠. 산별로 가야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 있는데…. 이번에 60.05%가 찬성했어요. 1천6백10표가 모자라서 못간 건데, 적은 것이 아닙니다. 내심 50%대에서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60%나 나온 것은 엄청난 성과예요."
-산별로 전환되면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은 어떤 기능을 하게 됩니까.
"지금도 민주노총은 개별사업장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각 연맹에서 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합니다. 다만 산별노조와 민주노총의 역할 조정은 이뤄지겠지요. 산별노조가 산업 내 정책을 개발하거나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민주노총은 국가 전반적인 노동정책이나 고용문제 등을 고민하는 것이죠."
-노사정위에 복귀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인터뷰에서 꼭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인데 민주노총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노사정위가 아니라 산별교섭과 대정부 교섭 등을 나눠서 하는 중층적 교섭구조가 만들어지면 참여를 검토하겠다는 것이죠. 이제까지 정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합의사항은 꼬박꼬박 법제화하고 밀어붙이면서 노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예를 들어 실업자 노조가입 등은 법무부 반대를 이유로 깨버렸습니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합의사항이 이행될지 의문이 듭니다."
-현 정부 들어와서 정부가 민주노총과만 대화를 한다는 한국노총의 불만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만나거나 이야기 한 건 없어요. 아마 상대적 박탈감일 겁니다. 한국노총이 이전의 정부와는 접촉을 갖고 발맞춰왔습니다. 그게 잘 안되니까 그런 것이겠지요."
-파업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노조가 무조건 파업투쟁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사관계에는 상대가 있는데 노사관계의 책임을 우리에게만 물을 때면 정말 당혹스러워요. 파업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파업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해결은 어렵습니다."
-노동 운동의 지도자로서 후회는 없는지요.
"구속과 수배도 여러번 당했지만 지나온 시간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어요. 사실 노동계는 국민이나 심지어 경제계의 비판을 그냥 흘려듣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고민합니다. 맞춰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이죠."
특별취재팀=김정수 전문기자(경제연구소), 남윤호.김기찬.하현옥 기자(이상 정책기획부) yh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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