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소식마당 > 헤드라인뉴스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117주년 노동절 기념 노동자대회 열고 “정부 수용 않으면 6월 초 중대결단!”
철도노조
File: 00.jpg(53.2 KB)
117주년을 맞은 노동절을 기리기 위해 서울 대학로에서 1일 오후 2시부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위원장 이석행·이하 민주노총)의 주최로 세계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는, 본 행사에 앞선 사전행사로 '비정규직 확산법 무효, 특수고용노동자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었으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투쟁! / 노동자는 하나다. 한·미 FTA 분쇄하자! / 세상 모든 차별에 저항하라!” 등의 초국적 구호들이 가슴 속 깊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학로엔 어느새 1만5천여 명의 수도권 노동자들이 모였다.


창원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노동자 통일대회에 참석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신해 대회사가 대독됐다.

대회사에서 “오늘은 선배 동지들을 기억하고 숭고하고 아름다운 뜻을 기리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특히 올해는 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20주년을 맞는 해이자,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이 되는 해”라고 강조했으며, “그러나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은 너무나도 암울하다”며 “경제종속, 구조조정과 대량실업을 강요하는 한미FTA가 강행되고, IMF 외환위기 이후 10년만에 최대의 경제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버릴 비정규확산법 시행령이 7월 1일부터 강행되면 이제 대한민국 땅에서 온전한 일자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은 현 정부를 향해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무효 선언 ▲비정규직 법안 전면 개정 ▲특수고용 노동자 등의 노동3권 보장 ▲산별교섭 법제화 ▲사립학교법 재개정안과 국민연금법 개정안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날 대회엔 미국노총 산별회의 제프 보거트 씨와 미국자동차노조의 더그 메이어 씨도 내빈으로 참석해 한미FTA 타결을 규탄하고 연대의 뜻을 밝혀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연단에 오른 제프 보거트 미국노총 산별회의 대표는 우리말 구호인 “투쟁!”으로써 인사를 하고, “미국노총 산별회의 대표로서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라 말문을 연 뒤, “한미FTA는 양국의 노동자들에게 해악적인 것”이라며 “비밀스럽게 진행된 협상은 노조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 못한 반노동자적인 협상”이라고 비난했다.

사진 좌에「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저자 조세희 선생님은 해마다 노동절엔 동지들의 사진을 담는다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참가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노무현 정부가 민주노총 5대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시 6월 전 조직적 총력투쟁 전개 ▲허세욱 열사 정신을 계승해 오는 6월 2일 성대한 49재와 한미FTA체결 저지 총력투쟁 ▲5월 19일부터 6월 30일까지 최저임금 쟁취투쟁 ▲산별임단투 총력투쟁 ▲한반도 평화대행진과 자주통일투쟁 △대선과 총선을 돌파하는 제2의 정치세력화운동 등을 결의했다.


오후 5시를 넘어 대회를 마친 1만 5천 노동자들은 광화문 교보빌딩 앞까지 한 시간여 동안 행진을 벌인 후 해가질 무렵이 되어서야 대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날 집회가 5월, 6월로 이어지는 향후 투쟁을 결의하는 자리인 만큼 정리집회는 준엄한 투쟁결의로 채워졌다.




메이데이의 기원

1886년 5월 1일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첫 시위를 주최했다. 미국에서 1886년은 노동자 투쟁이 거대하게 분출했던 격동의 해였다. 수많은 파업들이 사실상의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이 운동은 시카고ㆍ뉴욕ㆍ신시내티ㆍ볼티모어ㆍ밀워키 등 주요 공업 도시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5월 1일 전에도 전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위한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운동은 예상보다 더 크게 확대됐다. 5월 둘째 주에는 34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으며, 그 중 19만 명이 파업을 했다.


헤이마켓 사건

1886년 5월 3일 헤이마켓 광장에서 경찰은 파업 노동자 4명을 죽였다
1886년 2월 노동기사단의 지역 조직들이 8시간 노동 동맹을 결성했다. 한 달 뒤에는 노조가 이 동맹에 가세했다.
5월 1일이 다가오자 2백 개 공장의 노동자들이 공동 요구를 작성하고, 5월 1일 맥주 공장 노동자와 건설노동자 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밖에도 제빵, 담배제조 등 다양한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자 위협을 느낀 정부는 파업 노동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민병대의 유혈낭자한 무력을 사용했다. 무력 사용은 8시간 노동 운동의 중심이었던 시카고에서 절정에 달했다.
5월 3일 경찰은 파업 노동자 4명을 살해하였다.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린 파업 노동자들의 야간 집회에서 시위 군중을 공격하는 경찰을 향해 폭탄이 던져졌다. 이 사건은 조작으로 의심됐다. 지배자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해 시위를 금지하고 수백 명의 시위자들을 잡아갔다. 강경 대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8시간 노동 동맹의 지도자 7명이 체포됐다. 전 세계 노동자 단체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4명이 사형 당했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 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고 불꽃은 타오르고 있다. …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으리라.”(사형에 처해진 네 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스파이스의 최후진술 중)


세계로 확산되는 메이데이

메이데이 경축은 처음부터 민족적ㆍ인종적 구분을 뛰어넘었다. 흑인들의 주간지였던 <클리블랜드 가제트> 는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는 노동기사단원의 절반이 흑인이며, “흑인과 백인 노동자 간에는 유대가 넘쳐흘렀다”고 보도했다.

1886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은 유럽의 노동자들을 촉발시켜 행동에 나서도록 했다. 1889년 유럽 전역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참가한 회합에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됐다. 인터내셔널은 1890년부터 헤이마켓 광장 집회를 기념하는 국제적인 시위를 주최하기로 하고 8시간 노동을 위한 대규모 운동을 시작했다.

1890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는 5만 명의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했다. 벨기에에서는 34만 명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했다. 영국에서는 런던의 중심지에 있는 하이드 파크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1년 뒤에는 유럽 전역에서 메이데이 파업과 항의 시위가 있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약 10퍼센트가, 프랑스에서는 거의 1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했다. 미국뿐 아니라 벨기에ㆍ이탈리아ㆍ스페인ㆍ스위스ㆍ스칸디나비아반도ㆍ루마니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우리나라 메이데이의 역사

일제치하

우리나라 노동자들도 1920년부터 동맹 파업, 시위, 행진 등을 벌이며 전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메이데이를 경축하고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요구하며 전국 곳곳에서 메이데이를 기념했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5천 명의 파업을 시작으로 1920~1925년에 3백35건의 파업이 있었다.
1923년 조선 노동연맹회는 메이데이 기념 서울지역 동맹 파업을 결정하고 시가행진을 계획했다. 일제의 행사장 봉쇄로 노동자들은 장충단에 집결하지 못했지만 양화 직공 조합, 인쇄 직공, 고무 제조소 등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원산 총파업(1929년)
일제는 1924년 메이데이를 앞두고 “대개는 불온한 분자가 모여서 되지 못하게 떠드는 일이 많으므로 종래보다 더욱 강경한 태도로 단속하고 절대 허가하지 아니 할 방침”을 밝혔다. 그 뒤에도 해마다 5월이 되면 비상경계를 펴고 집결 예정지에 도착하는 노동자들을 모두 검거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은 한층 가혹해졌다. 치안유지법이 개악돼 노동운동 활동가는 최고 사형까지 당하게 됐다. 일제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5월 1일은 환희의 날, 시위의 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실천을 지속하였다. 조선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쟁취’, ‘노동자의 단결’,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파업, 시위, 리플릿 살포, 표어 부착, 강연회, 기념 야유회 등 여러 방법으로 메이데이 투쟁을 벌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에 맞선 투쟁의 맥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해방 이후 활화산처럼 다시 타올랐다.


미군정, 4.19 그리고 5.16쿠테타

해방 후 노동자 투쟁은 폭발적으로 고양됐다. 노동자들은 일본인의 공장을 접수하여 공장자주관리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에 힘입어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출범했다. 이에 앞서 11월 1~2일 철도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을 출범시키고 전평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46년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즉각 실시하라”, “쌀을 달라” “실업자에게 직업을”, “공장폐쇄ㆍ해고 절대 반대”, “언론ㆍ집회ㆍ출판ㆍ결사의 자유 보장하라”, “국가 전액 부담의 실업보험을 즉각 실시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1946년 9월 총파업

노동자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못난 노동자가 아닙니다. 이제야 우리의 살 길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의 무기인 단결의 힘으로 파업을 할 줄 알고 싸울 줄 압니다.”(<전국노동자신문> 40호(1946년))

미군정의 탄압, 대한노총의 테러, 감원, 일급제 등에 항의하여 1946년 9월 총파업이 벌어졌고, 1947년에는 전평 지도부 체포에 항의해 3월 총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미군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 3천5백여 명과 어용 대한노총의 회원 1천여 명이 동원됐다. 수백명의 노동자들 죽고 부상당했다. 9월 총파업과 3월 총파업으로 각각 천사백여 명과 2천여 명의 노동자가 구속됐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1947년 메이데이 기념식에 참가해 “해고ㆍ테러ㆍ폭압 반대 투쟁”을 결의했다.

미군정은 1947년 메이데이 직후 전평을 불법화했고, 메이데이 집회를 금지했다. 전평이 무력으로 붕괴되자 대한노총이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메이데이의 정신이 훼손당했다. 이때 철도노조도 해체되고, 운수부연맹이 창립되어 50년간의 노총 시대의 막이 열렸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1957년에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므로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며 날짜 변경을 지시하여 메이데이를 아예 없애 버렸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월혁명의 함성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조를 민주화하고, 노총을 배격하는 민주적인 전국 조직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을 건설하고 1961년 “메이데이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독자적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5ㆍ16 군사쿠데타로 메이데이는 다시 한 번 군화발에 짓밟혔다. 박정희는 한국노련을 강제해산, 수백 명의 노조간부와 노동운동가를 체포ㆍ구금한 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들고, 메이데이 대신 ‘근로자의 날’을 제정했다.


군사독재, '87노동자대투쟁 그리고 현재

군사독재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국 노동자들은 힘겨운 투쟁을 다시 시작했다. 1979년 YH 노동조합 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찌르는 비수가 됐으며, 1985년 구로 동맹파업은 연대 투쟁의 중요성과 조직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
YH 노동조합 투쟁은 박정희 정권 붕괴의 한 요인이 됐다(1979년)


1985년 대우자동차 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한 임금인상투쟁이 마무리될 무렵인 5월 1일 노동자와 학생 5백여 명은 서울 영등포 시장 로터리에 모여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치렀다. 1986년 5월 1일에는 출퇴근 시간에 구로공단 주변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1987년 7~9월 대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노동계급에 있음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1988년 5월 1일 노동자들은 1947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 대회’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1989년 메이데이 100주년을 앞두고 노동자들은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강력한 연대와 투쟁으로” 메이데이를 치르기로 결의했다. 투쟁 속에서 메이데이가 되살아나고 노동자들이 해마다 기념식을 치르자 김영삼은 1994년 ‘근로자의 날’을 다시 5월 1일로 변경하고 휴일로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투쟁으로 메이데이를 완전히 되찾은 것이다.

1994년 이래로 합법성을 쟁취한 민주노총이 매년 5월 1일에 메이데이를 경축해 왔다. 1994년 어용노조하의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은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과 함께 “변형근로 철폐, 8시간 노동제 쟁취”를 내 걸고 공동파업을 벌였다. 2000년 5월 민주노총은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벌였다. 2001년 메이데이 집회는 전국에서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해 김대중 정부의 개혁 파탄과 민생 파탄에 항의했다. 또,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도전했다.
현재까지도 심화되어 가는 신자주주의적 구조조정과 그 법적 제도화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메이데이 정신은 5월 1일만이 아니라 매시기 투쟁속에 살아 있다.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노동시간 단축, 작업 환경 개선, 임금 인상 같은 공통된 요구가 제기된다. 그리고 자본의 무자비한 지배에 대항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조직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자 조직과 연대의 필요성을 되새기는 투쟁의 역사다.

2007년05월01일 1:26:36   
출력하기
뒤로  목록  추천  위로


의견쓰기목록
서울철도총연맹
122.32.31.8
심용주라는자가... 이철이랑 민주노총이 같은노선이라고 씨부리던대..
2007-05-15
이름 비밀번호
내용쓰기